| 제 목 | 해외교육실습 소감 발표 | ||||
| 작성자 | 통합관리자 | 작성일 | 2008.12.04 | 조회수 | 3847 |
해외교육실습을 다녀와서 ○ 소 속 :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수학교육전공 우선 제가 경험한 해외 교생 실습은 국내와 같은 실습을 통해 학교현장을 경험하고 선생님으로써의 자신의 자질을 점검해 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 나라 간의 교육문화 차이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경험으로 얻은 것도 많았던 실습이었지만 반대로 제가 몸담아야 할 한국의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경험해 볼 수 없어 잃어야 했던 것도 많았던 제 실습에 대해 간단한 소감과 두 나라의 교육문화차이에 대해 간략하게 약술하겠습니다. 실습이 있기 2일 전 토요일. 중국 길림성으로 향했을 당시 전 무모하게도 중국말을 단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고 주위환경은 영화에서나 볼법한 빈민촌 같아서 이미 앞은 깜깜해지고 왠지 모를 두려움이 몰려왔는데, 거기에 눈도 오고 바람도 무지 불어 감당하기 힘든 추위에 사람들은 왜 다 무섭게 생겼고 말투는 왜 다들 싸우는 말투인지 실습 전 2일간의 자유시간의 제 모습은 말은 못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그래도 구경은 해보겠다고 거리를 헤매며 옷은 얇아서 떨고 제대로 먹은 것도 없어 기운은 없는 춥고 배고픈 31살의 국제 미아였습니다. 이렇게 힘겹게 주말을 보내고 녹초가 되어 잠자리에 들라 치니 이건 군대를 다시 온 듯하여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불행한 생활은 실습이 시작되는 첫 날 완벽하게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경험과 행복한 일들이 펼쳐졌습니다. 제가 간 길림조선족중학교는 중·고등학교로 저는 초중(중학교) 3학년 3반을 맡게 되었습니다. 첫 인사를 위해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기립!!!”이라는 반장의 힘찬 외침과 동시에 59명의 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귀가 터질듯 한 강렬한 박수로 절 환영해 주는데 순간 이게 공산당인가 하는 기분과 함께 난생처음 받아보는 환대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한국인 선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학생들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20초짜리 동영상, 30초짜리 음성 mp3, 각종 연속동작 사진 등 수많은 동영상과 mp3, 사진 등이 만들어져 학생들 사이에 돌며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민망하지만 사실입니다. 전 첫날 한국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질문하는 활동시간을 학생들과 가지면서 “한국의 학생들은 머리 길러도 되죠? 연애해도 되죠? 야간자율학습 안하죠? 교복 예쁘죠? 화장해요?” 등등 많은 질문을 통해 이곳 학생들도 한국의 학생들하고 다를 것이 없구나. 똑같은 16살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칙이 있고 학교에서 하지 못하게 하니 하고 싶고. 하지만 한 주를 지내면서 한국의 학교는 구속력이 강하고 오히려 중국의 학교는 자유가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에 자유라니. 교복(이곳의 교복은 트레이닝복)이 있으나 많은 학생들이 사복을 입고 있고, 핸드폰을 사용 못하게 하나 모두 학교 내에서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mp3, psp, pmp등 각종 멀티미디어 전자제품은 모두 들고 다니며, 만화책, 잡지 등은 교과서만큼이나 교실 내에 많으며, 간식 또한 많이 먹습니다. 이 모두가 교칙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나 선생님들께서는 어떤 처벌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수업시간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수업시간이 아니라면 사용을 허가하고 있습니다. 전 길림조중으로 유학 온 한국인 유학생 다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 보다 이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자유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반 구성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하면 1학년 때 한 번 정해진 반은 3년 동안 유지 되며 반장 또한 3년을 하게 됩니다. 부반장, 과목별 과대표, 숙제부장, 문예부장, 청소부장, 감독관 등등 굉장히 세분화된 역할분담이 되어 있어 그 책임을 다합니다. 이 역할분담에 의해 일명 한국 선생님들의 잡무의 대부분들이 학생들에 의해 처리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략하게 예를 들면, 여기 학생들은 하루 3번의 청소시간이 있습니다. 0교시 후, 점심 후, 저녁 후. 그러나 선생님은 청소 당번이 누구인지, 청소 상태가 어떤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청소당번은 청소부장이 알아서 칠판에 적어두고 그날 청소 조장은 또 알아서 청소구역 및 담당을 배분해주고, 각 반의 청소 상태 점검은 타 학년으로 구성된 청소 검사 감독학생 여러 명이 돌아다니며 창틀, 문틈을 비롯해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검사를 합니다. 전 한 달간 실습을 하면서 선생님들께서 잡무라고 생각되는 그 어떤 것도 하시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교문지도, 급식지도, 청소지도, 조회, 종례 등. 잡무가 없다는 말에 많은 분들께서 부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실 텐데 학급운영이 학생들의 주동적인 참여에 의해 대부분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상과(수업)에만 집중하시고 커절(수업준비)을 열심히 하시면 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 12시간(다른 과목은 잘 모르겠으나 수학의 경우)이라는 수업 시수입니다. 12시간이다 보니 주 6시간의 수업이 있는 수학의 경우 2개 반에서만 수업을 하면 됩니다.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우리에게 잔무가 없고, 수업 시수가 적다는 것은 너무도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선생님 본연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권위. 떨어질 대로 떨어진 한국 선생님의 권위와는 다르게 중국의 선생님의 권위는 한마디로 우리나라 60~70년대의 모습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한 수업시간의 학생들의 모습은 아마도 우리나라 선생님들에게는 꿈의 수업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질문을 던지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대답과 누가 이 문제를 풀어보겠냐는 질문에 마치 짠 듯이 여기저기서 자기를 시켜달라고 소리치는 학생들. 잘하는 학생은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서로 손을 들고 시켜 달라고 야단이고, 모르는 학생도 모른다고 수업에 참여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에게 시선을 때지 않고 집중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이곳의 수업시간은 선생님의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 아닌, 학생들의 적극적인 수업 참여로 토론이 끊이지 않고, 마치 학생과 선생님이 대화를 하는 듯이 수업이 진행됩니다. 이런 수업만 참관하고 진행해봤던 제가 교사가 되어서 우리의 교실 학습 분위기에 얼마나 큰 실망을 할 지 걱정이 됩니다. 전 실습을 통해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매력에 깊게 빠질 만큼 좋은 경험도 많이 했고, 덤으로 중국말도 어느 정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저 중국말 이제 좀 합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먹는 쪽부터 입이 트이면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첫 주에는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조선족 식당에만 찾아가 한국말로 한국 음식만을 시켜 먹었는데 차츰 이곳저곳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며 조금씩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푸짐하니 파전, 요리 등을 시키고, 밥 종류로 볶음밥을 시킬까? 찌개를 시킬까? 고민하다 찌개를 시켰는데 당연히 나올 줄 알았던 공기밥이 나오지 않아 공기밥을 추가 하고 싶어도 메뉴판에 있지를 않아 다시금 볶음밥을 하나 더 시켜 혼자 3, 4인분을 시킬 때도 많았던 제가 “미판(공기밥)”을 외치며 슬슬 사람답게 음식을 시켰고, 거리에 상관없이 무조건 걸어 다니던 제가 학교로 가는 말, 호텔로 가는 말을 배우면서 택시를 타기 시작했고, 목적지는 말할 수 없어도 즈저우(직진), 주어과이(좌회전), 요우과이(우회전), 쩔(여기)을 외치며 가고 싶은 곳을 찾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중국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일상생활에서 안 해도 될법한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학교에 정전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물을 전기로 퍼 올려 쓴다고 하는데 정전으로 인해 물을 퍼 올릴 수 없어 실내의 화장실을 폐쇄한 날이 하루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화장실이 비위생적이라 이용을 자제하는 편이였는데. 실내 화장실의 문짝은 전부 망가져 없고 남자 개인 소변기는 고사하고 벽에다 그냥 싸는 수준인데. 평소 학생들은 문도 없는 곳에서 큰일도 잘 보고, 일 보면서 이야기도 서로 잘 나누던데 전 그래도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지라 중국의 재래식 화장실만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참다 참다 그곳에 갔을 때는 최악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재래식처럼 그냥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까지는 똑같았는데 문은 전혀 없어 앞이 터져있고 화장실 칸을 구분하는 중간 벽들은 엉덩이 높이 까지만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더 최악의 것은 이미 어떤 곳인지 알아버려서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하는 곳인지를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화장실 신호가 더 왔다는 것이였습니다. 길림조중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0교시 자율학습에 1-2교시 수업, 30분간 체조(겨울에는 운동장 3바퀴 돌기), 3-4교시 수업, 1시간 점심 식사, 5-8교시 수업, 9교시 자율학습, 1시간 저녁 식사, 3시간 야간자율학습을 합니다. 아침 7시 20분부터 저녁 8시 40분까지이며 토요일에는 0-7교시까지 수업이 있으며, 일요일에는 저녁 야간 자율학습이 3시간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 7일을 학교에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에게 학교 외에 다른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어 보였고, 학교가 전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가깝고도 먼 고향의 나라 한국에서 한 선생님이 찾아와 수업시간 마다 창밖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수학시간에는 수업을 하고, 때론 수학이 아닌 기타 과목 시간에도 수업에 참여하여 함께 소리치고, 매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학생들 간식은 다 빼앗아 먹고, 9교시 자율학습시간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한테 장난이나 걸고, 자율학습 시간을 놀이시간으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고, 저녁시간에는 학생들과 함께 저녁을 하고, 때론 야간 자율학습에 불쑥불쑥 들어 가 또 장난치고, 항상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몰래 사진을 찍던 제가 그들에게는 어떤 선생님으로 기억될지 궁금합니다. 모든 분들께서 실습 마지막 날 많이 슬퍼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든다는 건 참 무서운 일입니다. 마지막 날 9교시 자율학습시간 제게는 눈물의 시간 이였습니다. 다시 생각하면 너무도 창피스럽습니다. 한 시간 멋지게 작별인사하면서 좋은 추억 만들려고 전날 잠도 안자고 폼 나는 말도 많이 준비하고 연습도 많이 했었는데 교탁 앞에 서서 입을 여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해 대한민국 남자 망신 다 시키고 왔습니다. 몇 번을 마음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고 했으나 자꾸 눈물이 나 말문을 열수가 없었습니다. 4번의 시도 끝에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저 때문에 모든 학생들은 눈물바다가 되어 모두 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순간 평소 아끼던 학생들을 한 번이라도 더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에 아끼던 학생들을 한명씩 보는데 사제지간의 사랑이 바로 이걸 말하는 것인가 그 순간의 학생들의 눈망울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5분을 남기고 말문을 열어 눈물의 인사를 했습니다. 종이치고 나서야 안정된 마음으로 5분, 10분, 15분이 지나도록 교실을 떠나지 않는 59명의 우리 반 학생들과 전날 준비한 멋진 말들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불러주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또 닦아야만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받았던 귀여운 편지, 이제는 하루에도 몇 통씩 날아오는 e-mail을 읽고, 답장을 쓰면서 첫 제자들과 함께 나눈 사랑을 그리고 앞으로 만날 제자들과의 시간을 꿈꾸며 참다운 스승이 되고자 다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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